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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한 박사 서거 20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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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일한
    元一漢 Horace Grant Underwood Ⅱ
    (1917~2004)
    생몰연도
    1917 ~ 2004
    약력
    1939
    미국 북장로교 파견 한국선교사로 부임
     
    1940 ~ 1941
    연희전문학교 영어 강사
     
    1942 ~ 1946
    미 해군 복무
     
    1946 ~ 1947
    서울대학교 교무과장
     
    1947 ~ 1976
    연희대학교 복직(1957년 이후 연세대학교) 교육학 교수
     
    1950 ~ 1953
    미 해군 재복무, 인천상륙작전 참가, 수석통역관
     
    1956 ~ 2004
    경신중고등학교 이사
     
    1957 ~ 1963
    연세대학교 이사
     
    1960.8. ~ 1960.12.
    연세대학교 총장서리
     
    1964 ~ 1974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
     
    1968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
     
    1977 ~ 2004
    연세대학교 이사
     
    1983 ~ 2004
    한미협회 부회장
     
    1989
    뉴욕 해밀톤대학교 명예문학박사
     
    2002
    회고록 『한국전쟁, 그리고 평화』 출간
     
    2004.1.15.
    소천
  • <원일한 박사의 생애>
    원일한 박사는 1917년 서울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자이자 원한경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평생 한국에서 선교사로서 헌신했다.
     
    "교육선교사로서 나의 생애는 한국의 종교와 교육이라는 두 가지 분야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한국전쟁, 혁명 그리고 평화』, 2002)
  • 어린시절의 회상
    언더우드가 앞 정원
    언더우드가 앞 정원, 1928
    "그곳(언더우드 기념가)에서 보낸 저의 소년 시절은 그야말로 행복한 'Golden Age'이었습니다. 토요일마다 넓은 마당에서 동생들과 동네 아이들이 어울려 뛰어놀았고, 정말 아릅답고 행복한 기억이 많습니다."

    "소년 시절에는 겨울이 되면 언더우드관 뒤에 있었던 작은 논에서 스케이트도 타고 하키 시합고 했고, 눈이 많이 온 날에는 현재 알렌관 앞길에서의 의료원까지 비탈길에서 스케이트나 썰매를 타기로 했습니다. 또 그 당시에는 언더우드관 뒤에 지하터널(하수)이 있어서 친구들과 전등을 손에 들고 그 밑을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캠퍼스 모두가 내 마당이라고 생각했고 정말 많은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원일한, 『연세소식』 - [여기는 연세인], 2003.5.1.)
    어린시절의 회상
  • 선교활동의 부르심을 받고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해보고 싶다는 소신에 심각한 의문을 품어 본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말할 것도 없이 내가 선교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부모님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분들의 생활 태도와 봉사활동에서 드러나는 깊은 신앙심은 내게 큰 영감이 되었다."
     
    "다른 일거리가 없어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일까? 집안의 은근한 압력 때문에 그럴까? 그 당시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으나 나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확신하고 있다. 타의에 의해서 교회 일에 뛰어들었다가 얼마 안 가서 그만두는 사람들을 많이 본 나로서는 내가 걸어온 길은 정녕 하늘의 부름심이었다고 믿는다."
      
    (『한국전쟁, 혁명 그리고 평화』, 2002)
  • 한국전쟁
    "최후의 공격이 끝나자 나는 연세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학 행정 빌딩에 포탄이 관통한 흔적이 보였고 스팀슨(Stimson)홀의 지붕이 불에 타버렸다. 도서관의 지붕에 포탄이 떨어져 책이 여러 권 피해를 보았다."
      
    "전투가 끝난 한 이틀 후에 폐허가 된 우리 집 주위를 돌아보고는 비통한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우리 집이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집 근처 동산의 중턱이 산산이 흩어져 나무들이 사방팔방으로 조각이 났다."
     
    "판문점에서는 우리측에 3명의 공식 통역이 있었는데 디크와 나는 한국말 통역이었고 (중략) 한국말로 번역을 하고 즉석 통역은 거의 내가 하였다. 그런데 처음에는 디크가 회담에서 한국말 통역을 하게 되었다. 최초의 회담에서 나는 뒷자리에 앉아서 한국말을 모르는 척 하였다. 그런데 사정이 좀 긴박하게 되자 디크하고 내가 합의하기를 내가 한국말 통역을 맡기로 하였다. 디크하고 나는 한국말을 아주 잘 했지만 회담에서 사용되는 어휘는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혁명 그리고 평화』, 2002)
  • 한국전쟁에 통역관으로 참전한 원일한
    한국전쟁에 통역관으로 참전한 원일한, 1951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언더우드가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언더우드가, 1953
     
  • 연세에서
    "나의 할아버지는 연세대학교의 창설자이며 나도 일생 동안 이 학교에 관계하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 우리 가족의 한 사람이란 사실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1955년 여름에 한국에 돌아온 후 나는 연희대학교(현재 연세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영어를, 조금 있다가는 교육학을 가르쳤다."
      
    (『한국전쟁, 혁명 그리고 평화』, 2002)
  • 도서관장 시절의 원일한
    도서관장 시절의 원일한, 1964
    "내가 연세대학교 교수로 30년 이상을 봉직했으나 "교수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 중에서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1951년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후 나는 연세에 파견된 수석 선교사였다. 나이가 더 먹어서가 아니라 경험상으로 그러했다. 나는 가끔 우스갯소리로 나 자신을 연세의 "외무장관"이라고 불렀다."

    (『한국전쟁, 혁명 그리고 평화』, 2002)
     
  • 원일한 박사의 소원
    "개인적인 소원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일생을 축복하셔서 건강하고, 가족관계도 좋고, 연세대와의 관계도 살펴주셔서 개인적인 소원은 없습니다. 제 소원은 오로지 연세대학교의 영원한 발전 그것뿐입니다."

    (원일한, 『연세소식』 - [여기는 연세인], 2003.5.1.)
    사무실에서
    사무실에서, 1985